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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우리의 시작과 끝은 무엇인가: 폴 고갱

by 파랑성 2023. 12. 10.

후기 인상주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폴 고갱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알만큼 유명한 작품을 여러 장 남긴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과 그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탐구해 보겠습니다.

 

 

폴 고갱은 누구인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남태평양의 원주민과 원시적인 자연을 특유의 강렬한 화풍으로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종교적인 요소를 그림에 자주 넣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고갱의 아버지는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은 자유주의 언론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사회주의 활동가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외종조부는 페루의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했던 정치인이었으나 대선에 실패하며 고갱 가족은 다시 파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갱은 증권회사에 취업해 11년 차 베테랑 증권 중개인이 되었고, 20대 후반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간간히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35세가 되던 해인 1882년, 파리의 증권시장이 붕괴하자 고갱은 직장을 그만두고 화가로 전향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후기 인상주의의 특징, 인상주의와의 차이

폴 고갱은 피사로 카미유와 같이 인상파 화가와도 과거에 친분이 있었으나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인해 절교한 뒤, 기존의 인상주의가 자연에만 집착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며 '상징주의(Symbolism)'를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의 순간을 담기보다, 화가 본인의 사유를 작품에 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이죠. 고갱은 미술이 관찰을 통해 얻은 객관적인 기록보다 사유에 대한 보이는 상징이 되기를 바랐고, 이런 생각은 과학적 근거를 뒷받침해 그림을 그리려 했던 신인상주의의 사조와도 맞지 않았죠. 고갱이 추구했던 내면의 심상과 외부의 실상이 혼합된 미술을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 혹은 탈인상주의로 부르며 다른 말로 '종합주의(Synthetism)'라고도 합니다. 상징주의를 자연을 묘사하는 것보다 중요시 여기 돼, 자연으로부터 추상을 이끌어내려 했기 때문에 후기'인상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신인상주의와 조르주 쇠라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 점 하나에 빛을 담다: 조르주 쇠라

 

고갱이 '원시'에 집중한 이유

고갱은 인간이 본래 선하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문명 때문에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것이라 믿었고, 이 때문에 그는 순수함과 문명화되지 않았던 원시 사회를 갈망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는 다른 인상주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자연물을 명확한 형태로 깔끔하게 표현하며 인상파와의 차이를 두었습니다. '원시 사회'는 고갱이 생각하던 가장 순수한 것이자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던 세계였습니다. 다시 말해 고갱에게 문명은 타락의 상징이었으며, 그 반대인 원시는 타락하지 않음의 상징이었습니다.

타히티의 일상은 고갱에게는 예술에 대한 영감 그 자체였다고 볼 수 있죠. 타히티는 오랜 기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고갱이 작업을 하던 기간에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식민지 지배는 타히티 원주민들에게 강제로 새로운 유럽의 풍습을 주입시켰고,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기존의 전통과 충돌하며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또한 그는 <타히티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에 녹여내었고, 이 작품은 추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폴 고갱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1897~1898, 보스턴 순수 미술 박물관 소장

 

1897년, 폴 고갱에게는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그가 아끼던 큰 딸 알린의 폐렴으로 인한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고갱의 후원자들은 지원을 끊었으나 살던 집을 더 좋게 개조하려 대출을 받았던 상태였고, 병세악화와 가난으로 괴롭고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결심하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대작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이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목부터 고갱이 느끼던 삶의 허무함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위에서 말했듯 타히티로,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갓난아기부터 흰머리의 노인까지 총 12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며 삶의 시작과 끝,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세 파트로 나누어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죠. 

첫 번째 파트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입니다. 작품의 우측을 보면 아기는 그림의 오른쪽 너머를 향해 보고 있고 아기 주변을 둘러싼 여인들은 각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가 아기의 엄마인지 잘 감이 오지 않죠. 이 부분에서 우리는 공동육아를 하는 타히티의 풍습 또한 엿볼 수 있습니다. 삶의 시작을 나타내는 아기. 하지만 삶의 과정을 의미하는 작품 밖을 쳐다보며 앞으로의 날들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또한 엄마를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고갱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나 싶기도 하네요. 고갱의 삶에 허무함이 찾아온 만큼 삶의 시작에 대한 이유 또한 허무하다고 느꼈을 수 있겠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이 듭니다.

 

작품의 중앙은 두 번째, "무엇이 되어" 파트를 의미합니다. 원시의 여성이 나무의 과일을 따먹고 있는 장면, 어디서 들어보신 것 같지 않으신가요? 성경적인 그림을 자주 그린 고갱이였던 만큼 이번 작품에서도 성경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를 따먹는 이브의 장면이죠. 고갱은 '우리는 무엇이 되어가는가'에 대하여 인간은 삶의 과정 중에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고 탐욕스러워지는, 그리고 죄를 짓는다고 작품을 통해 답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꿈꾸던 이상향, 순수라고 믿었던 원시사회에서도 그는 '인간의 악함'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아무래도 고갱이 타히티에 실망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과일(선악과)을 먹고 있는 아이를 그려넣음으로써 어린아이부터 죄를 짓는다는 뜻으로 성악설에 대해 말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린아이가 욕심을 가지게 되어 삶을 살아가며 겪게 될 고초를 암시하는 듯하네요. 몸의 방향 또한 삶이 아닌 죽음(그림의 왼쪽)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눈에 띄는 주요 인물들 중 과일을 먹고 있는 아이만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 나체의 부끄러움을 인지한 것처럼 아이 또한 죄를 짓기 시작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그림 속에 보이는 푸른색의 석상이 보이시나요?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고갱 작품의 상징주의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 석상은 '히나'라는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폴리네시아 여신입니다.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요소인데 극 좌측이 아닌 중앙의 좌측에 위치해 있죠. 아이가 과일을 먹는 것도 지켜보며, 인간의 탐욕스러운 면과 악한 면들을 감시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업보가 죽음에 이르게 하고 사후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처럼 보이네요.

 

이 흐름대로 시선을 옮기다 보면 작품의 좌측이자 세 번째 파트인 "어디로 가는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늙은 여인이 머리를 쥐며 후회하는 듯이 웅크린 제스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발치에는 하얀 새가 도마뱀을 밟고 있으며 이는 '언어의 무력함'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그대로 해석해서 이제 와서 해명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인 걸까요? 운명에 대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싶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보면 고갱이 그림 속에서 아주 긴 말을 들려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폴 고갱의 죽음

1900년도에 들어서고 고갱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마르키즈 제도에 타히티에 걸었다가 실망했던 기대를 다시 한번 걸며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타히티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문명의 손길이 닿아있었습니다. 1902년부터는 법적논쟁에 휘말리며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고갱은 논쟁이 지속되던 와중에도 악화되는 병세에 고통스러워했는데, 결국 이 고통을 덜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댔고 마약중독자가 됩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사망하게 됩니다.

 

 

 

 

고갱은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끝없이 사유하며 그림 속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고, 풀어냈죠.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가며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살아가며 평생 풀어내야 할 숙제 같은 질문이자 숙제입니다. 이 철학적인 이야기를 그림 하나에 남긴 고갱은 단연 미술사에 전설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근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며 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게도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통해 깊은 사유를 할 때 고갱은 그가 인생을 바쳤던 예술로 도전을 성공적으로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