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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삶의 기쁨이란: 앙리 마티스

by 파랑성 2023. 9. 3.

앙리 마티스와 예술에 대한 꿈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1869년의 마지막 날, 프랑스의 부유한 곡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 법원에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 기억되는 인물이지만, 젊은 시절의 마티스는 예술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스무 살에 겪은 심한 맹장염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병원 침대 위에서 누워있던 그를 위해 어머니는 물감통을 가져다주었는데, 마티스는 이것이 "일종의 파라다이스"였다 말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물감과 색채에 빠져들게 되었고, 예술세계를 향한 꿈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22살의 나이로 예술가의 꿈을 키워나갔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직 클래식한 그림을 그리라는 조건을 걸었고, 아버지의 지원이 필요했던 마티스는 그 조건을 수락해 마침내 허락을 받아냅니다. 이렇게 그의 예술적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티스는 고흐와 세잔의 스타일처럼 자유롭고 다채로운 색감의 화풍에 매료되었고, 점점 그의 화풍을 찾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야수파'의 탄생

1905년부터 앙리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은 그룹은 모두 어딘가 강렬하고 거칠었던 작품성향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전시를 하던 중 1906년, 마티스의 작품 "모자를 쓴 여인"이 한 살롱에 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고대 느낌의 조각상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본 한 평론가가 이 작품들을 보고 "마치 야수들에 둘러싸인 다비드상처럼 보인다"라고 말했는데, 이 평론가의 발언이 자극적이라고 느낀 언론들은 그들의 그림을 '야수 그림'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이 그들의 그림을 '야수 그림'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비판적인 어감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은 이런 비판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야수 그림'이라는 말을 마음에 들어 했고, 그들 스스로를 '야수파'라고 칭하기 시작합니다. '야수파'로 불리는 그들은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예술적 경계와 비판도 마주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현실에 대한 생각을 결여하고, 가짜 같은 순수함만 그린다는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티스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밝고 순수한 색감과 행복을 그리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라이벌 구도

한 살롱에서 만난 두 예술가,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 이 피카소는 마티스보다 11살이나 어렸지만 금세 라이벌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두 화가가 라이벌로 평가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그들의 출신지가 프랑스였고, 비슷한 소재들을 작품에 다뤘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와중에 그들은 극명한 화풍 차이를 보여주었고, 이 때문에 라이벌 구도가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피카소는 대체로 상상 속의 대상을 우울하고 심오하게 표현했지만, 반면에 마티스는 자연 속의 대상을 밝고 순수하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경쟁은 당시 예술 세계에서 이슈화되며 덕분에 두 화가는 나란히 유명세가 올라갔습니다.

 

앙리 마티스의 대표작

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 (The Joy of Life)", 1905-1906, 이미지 출처: Artvee

선명하고 강렬한 색감이 특징인 "삶의 기쁨 (The Joy of Life)"은 앙리 마티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예술적 스타일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히며, 그의 예술적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작품 속에서는 자연 속에서 자유로이 뛰노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벌거벗음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으며 자연과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삶의 기쁨>은 자유로운 삶과 순수한 즐거움을 표현한 것으로, 작품의 제목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과 환희를 느끼게 합니다.

이 작품은 현시대에서 마티스의 걸작으로 평가되지만, 그 당시 유럽 사회에서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유럽은 전쟁의 위험이 높아진 불안한 사회적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서 마티스의 작품은 사회적 문제와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예술이 비관적인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의 내면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데 쓰임 받을 수 있으며, 지친 이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균형 잡힌 때 없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이에게 휴식처 같은 그림을."

- 앙리 마티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마티스의 작품에도 영향은 있었습니다. 순수하고 밝았던 그의 그림들이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보여주는 듯 점차 우울해지고 어두워졌습니다. 또한 이때, 마티스는 자신이 고집하던 화풍과 당시 주류였던 입체파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도 전쟁이 끝난 뒤 마티스의 화풍은 다시 원래대로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고비를 견뎌낸 뒤 더욱 단단해진 그의 그림은 2차 대전이 발발해도 다시 우울해지지 않았습니다.

 

"입체파 역시 흥미롭지만, 나의 본성에 직접 와닿지 못한다."

- 앙리 마티스

 

포기하지 않는 마티스의 열정: 마티스의 노년기

Photo by H&eacute;l&egrave;ne Adant / Archive Photos via Getty Images

2차 세계 대전이 마침표를 찍었지만, 마티스는 새로운 위암이라는 새로운 시련을 맞이했습니다. 수술을 통해 전이는 막았지만, 그는 휠체어와 병상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며,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힘든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마티스는 행복에 대한 그의 탐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티스는 색종이와 가위를 가지고 작업하는 '종이 오리기(Paper Cut-Outs)'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 방식은 그림을 직접 그리는 대신, 다양한 색종이를 자르고 조합하여 작품을 창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이 작업 방식을 '가위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칭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창의력을 계속해서 표현했습니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종이 오리기 방식을 사용한 미니멀한 형태와 선명한 색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드디어 틀에서 해방된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으며, 더 이상 신체적 제약에 묶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을 찾았습니다. 

1954년 프랑스의 니스에서, 앙리 마티스는 84세의 나이에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은 예술적 열정과 탐구의 역사로 남아 있으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그의 예술적 유산을 기리며 감상되고 있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예술을 통해 삶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하고 표현한 예술가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선명한 색채와 대담한 형태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예술적 열정은 그의 삶을 빛나게 했습니다. 마티스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을 놓치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행복에 대한 그의 시선과 예술적 탐구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삶과 예술을 사랑하고, 그 두 가지를 하나로 엮어냈습니다. 이러한 앙리 마티스의 열정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야수파의 거장으로 남아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